2009년 12월 21일
괜찮다고 말하는 게 아니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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밥을 먹으러 갔다. 날도 추운데 냉면이었다.
둘이 있을 땐 다른 생각을 하면 상대에게 실례가 되니까,
되도록 말도 많이 하고, 집중하려 하는데,
그 날 따라 왠지, 오이가 많이 나왔다.
그리고 그 날 따라, 유난히도 오이를 싫어했었던,
누군가가 생각이 난 것 같다.
어디야?
찜질방.
이 시간에? 새벽이잖아?
응, 그냥 집에 있기 싫어서 나왔어.
혼자?
아니,
그럼 누구랑?
...그냥 아는 오빠랑.
단 둘이?
..응.
저번 그 남자야?
..아니.
하...또 다른?
아냐,,왜 그렇게 생각하는건데,
연락 다 끊었다고 했잖아! 다른 남자들이랑!
아직도 남았어? 몇 명이나 더 남았어?
아..아니야, 그냥, 근처 사는 오빠야,
정말 별 거 아니,,
..왜? 대체 왜 그러는건데?
그냥..별 거 아니잖아? 왜 목소리 깔고 그래.
아니,,남자친구니까, 신경 쓰일 권리는 있다고 생각하는데,
아무 일도 없어. 전화도 내가 건 거잖아.
그런 문제가 아니잖아! 넌 왜 항상..
그 이후로, 나는 꽤나 화를 냈었고,
아마도 통화가 끝난 뒤, 그녀는 울었을 거라 생각한다.
항상 이런 식였다.
저번엔 아는 동생, 이번엔 아는 오빠,
도대체 아는 남자가 몇 명인건지.
사귀는 사람이 있는 시점에서,
왜 단 둘이, 그런 늦은 시각에,
술집에 가고, 찜질방에 가고,
서로 연인이 있고, 서로가 연인이 아닌 관계라면 조금 지나친 감이 있는,
그런 행동을 해야하는건지.
내가 어디까지 이해해야 하는건지,
아니, 이해해야 하는건지.
몇 번이고 하지 말라고 말해봤다.
내가 더 중요한지, 그가 더 중요한지,
말하라며 유치하게 윽박지르기도 했다.
이해할 수 없었다.
나로는 만족할 수 없는건지.
왜 다른 사람이랑 그렇게 자주 만나는건지.
사귀면서 항상 제일 많이 화가 났을 때는,
우습게도,
내 핸드폰에 그녀 번호로 부재중이 등록되어 있을 때였다.
그녀의 전화는, 대부분의 경우 어떻게든 받지만,
가끔은, 일이라든지 있어서, 못 받을 때가 있어서,
10분 정도 지나, 아차, 싶은 채로 이 쪽에서 전화를 걸면,
언제나 그렇듯, 통화중이라는 메세지와 함께 얄미운 사서함이 나온다.
그 새를 못 참고, 다른 사람에게, 다른 남자에게 전화를 건 거다.
나 아니어도 되는건지.
조금 있으면 내가 다시 전화할 거 알면서,
꼭 그 사이에 그 잘난 외로움을 달래려,
다른 남자를 끌어들여야만 하는건지,
화가 났다.
어디사는 누구냐고.
당장 말하라고.
말하면 어쩔건데? 왜 그래, 무섭게, 그러지마. 왜 화내는거야?
몰라서 묻는거야? 너 정말 왜 그러는건데!
바보라고 생각했다.
나쁘다고 생각했다.
이 정도밖에 안 되는 여자인가.
사랑에 가장 필요한 건, 믿음이라고 생각했었다.
그리고, 이런 여자는, 믿을 수 없다. 라고 단정지었고,
몇 년 전의 크리스마스 이브날.
난 산타처럼 이별을 말했다.
다시는, 저딴 여자 사귀지 않겠다고.
만신창이가 되어버린 채로, 다짐하고 다짐하고,
다짐했다.
조금 더 눈을 높여야겠다고 생각했다.
저런 여자한테, 시간을 뺏기지 않도록.
생각해보니, 참 나에게 모자란 여자였다.
여자면서, 야한 거 밝히는 점도 싫었고,
심각한 얘기를 하려 하면, 멍청한 얼굴을 하고,
화를 내면, 애교로 그냥 넘어가려하고,
말도 안 되는 고집을 피워서 한 밤 중에 자기집까지 오게하고,
툭하면 삐지고, 울기나 하고.
집 안도 그리 좋지 않았다.
복잡한 가정이었었지.
그래, 뭐 하나 맘에 드는 면이 없어,
내가 도대체 저런 여자를 왜 사귀었던지,
도무지 이해가 안갔다.
하지만, 생각해봤다. 나쁜 건 나였다.
그녀는 항상 그대로였다.
변한 건 나였으니까.
난 잊고 있었다.
내가 고백했었던 그 날을.
아니, 고백받았다고 해야하나,
중요하지 않아, 어쨌든, 우리가 시작됐던 그 날을,
분명, 그 때, 그녀는 말했었다.
나,,아는 남자가 조금,,많은데, 괜찮을까,
나,,,부끄럽긴 하지만, 좀 밝히는데,
싫어할텐데,,남자들, 많이 싫어하던데,
우리 집,,좀 복잡해. 아빠가,,,응,,
나, 생각이 짧아서,,고민 같은 거,
들어주긴 할 수 있는데,,어떻게 해야할지,
잘 모를텐데,,막상 해와도,,의지가 될지 어떨지,,
나, 외로움을 많이 타서,,자꾸 귀찮게 할지도,,
밤 늦게 자꾸 전화해달라 할지도 모르는데,,
이런 나라도, 괜찮을까?
난, 웃으며, 괜찮다고, 했었다.
아무 것도 중요하지 않았다.
단지 이제부터 넌 내 여자라는 것,
그거 하나만이 내게 있어 전부였다.
니가 실제로 어떤 사람인지 같은 거,
중요하지 않았다. 내 감정만이 중요했을 뿐.
내 눈에 보이는 네가, 너의 전부라고 생각한 채로,
난, 짐짓 관대한 듯 웃으며, 괜찮다고, 말했다.
그런데, 괜찮지 않았던 것 같다.
아니, 처음부터 괜찮지 않았다.
그녀가 주저주저하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던,
이런저런 것들에 조금 더 귀를 기울였더라면,
난 아마도 기겁하며, 시작하지도 않았겠지.
난 포용할 능력도, 이해할 아량도 없었다.
그녀가 부족했다고 생각했었는데,
정작 부족한 건 나였다.
처음부터 한결같았던 그녀에게,
난 첫 날은 웃었고,
둘째 날은 정색했고,
셋째 날엔 화를 냈고,
넷째 날, 눈물을 줬다.
처음부터 끝까지, 멋대로 변해버린 건 나였어.
이해하지 못할 거라면, 감당하지 못할 거였다면,
시작하지 말았어야 했다. 그 정도밖에 안되는 나였다면.
내게 전화해줬다.
거짓말하지 않고, 누구랑 어디에 있는지, 얘기해줬다.
그렇게 솔직하게 말해버리면,
내가 또 다시, 화를 내며 윽박지를 거란 걸, 다 알면서도,
겁에 질린 목소리로, 전화해서, 사실을 말했었다.
왜, 믿지 못한걸까.
속이려 했으면 얼마든 속일 수 있었던 그녀가,
애써 말해 준, 그녀에겐 정말로 별 것도 아니었던,
그런 일들이, 왜 그렇게 못마땅하고, 크게만 느껴졌을까.
괜찮아, 그런 것 쯤.
왜 난 그 때, 그리도 무책임한 말을 한걸까.
남자의 후회란 늦다.
조금이나마, 그 때의 그녀를 이해할 수 있게 된 건,
그녀와 헤어지고 나서, 년 단위의 시간이 흐른 뒤였으니까.
정말로 철부지 어린애.
처음부터 끝까지 멋대로 화만 내고, 상처주기만 하고,
이해해보려 하지도 않은 채 맘에 들지 않으면 짜증만 냈었던,
그런 나와 만나준, 그런 나를 사랑해 준,
그녀에게는 지금도 솔직히, 할 말이 없다.
조금 더, 상대의 말을 들었더라면,
조금 더, 내 이해심이 컸더라면,
조금 더, 내 마음에 여유가 있었더라면,
조금 더, 내가 그녀를 사랑했더라면,
조금 더, 내가 철이 들었었더라면,
시간은 서로에게, 몇 명의 다른 사람을 데려다 주었다.
소식을 마지막으로 들은 건, 꽤나 오래 전이지만,
잘 지내고 있을거라, 그렇게 편하게 생각하기로 했다.
사실 감정이라는 게 그렇게 고상한 게 아닌건지,
지금에 와서는 그저 희미한 후회, 그 이상의 느낌은 없다.
어찌보면 담담하게, 조금은 시시하게,
그렇게, 내 첫 경험은 끝났다.
헤아릴 수도 없이 무수한 양의 라면만을 남긴 채로. 그렇게.
지금의 나라면 어떨까, 라고 문득 생각했다가,
나도 모르게 조금 웃었는지,
이게 웃긴 얘기냐며,
왜 웃냐고 혼났다.
# by | 2009/12/21 04:18 | U | 트랙백(1) | 덧글(24)



